정말 별거 아니고...
이번 달 필사 기록을 좀 모아보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어요
좋은 문장들이라
같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직접 타이핑한 전문들... 이므로
오타 발견 시 방명록으로 조심스럽게 알려 주시면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그냥
심심하니까
갖가지 이유로 방명록 남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__)

여름 편지, 이승희
있잖아요, 내 발목이 어디로 흘러갔나 봐요.
바람이 부는데 나는 자꾸만 계몽되고 있어요.
착하고 온순한 구름으로 만들어지는 걸 보고 있어요.
한때 나라고 생각했던 슬픔들이 구름 속에서 잘 자라죠.
개종한 나무들은 새로운 골목에서 자라겠죠.
이 계절은 그래요.
모든 끝이 간지러워서 아무데나가 여기가 되어 꽃피곤 하죠.
창문에 엽서들이 흔들리며 모든 풍경이 빵처럼 부풀고 있죠.
잡담들이 뜨거워지고 나는 나를 나로 둘 수가 없어요.
이건 질문도, 대답도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만든 골목이 생겼을까요.
새로운 길만큼 폐허는 융성하겠지요.
지리멸렬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겠고요.
그해 여름의 골목에서 기차를 기다리겠지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죽어가겠지요.
보고 싶군요,
여름이잖아요.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이이체
당신과 재회했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되는 병에 걸리게 한다.
내 기억은 당신에게 헤프다.
어쩌면 이리도 다정한 독신을 견딜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다.
당신의 기억이 퇴적된 검은 지층이 내 안에 암처럼 도사리고 있다.
어떤 망각에 이르러서는 침묵이 극진하다. 당신은 늘 녹슨 동전을 빨고 우는 것 같았다. 손이 잘린 수화를 안다. 우리는 악수를 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추상의 무덤에서 파낸 당신의 심장을 냇가에 가져가 씻는다.
누가 버린 목어를 주웠다. 살덩어리가 단단해서 더 비렸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저토록 비리게 굳어버린다던, 당신의 이야기. 이따금씩 부화하는 짐승의 말.
지금 쉬운 것은 훗날에는 아쉬운 것이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강기슭에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 끊었던 탯줄을 간직해 두었다가 죽을 때 함께 묻는 풍습이 있다. 서로 떨어지지 못한 채 남이 되어버린 슬픔. 지금은 내가 먹을 수 없는 타액을 떠올리며 나는 마르게 웃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받고 싶었던 거라고 자백했다. 살을 짚어 만나는 핏줄처럼 희미하게 그리워하는.
심장은 몸이 아니라 몸의 울림이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믿겠다.
그 아픔에 순교하는 심장이 사랑이다.

이별식, 공석진
무거운 침묵이 이별식장에 흐르고 있었다
찬란했던 사랑은 타인의 발에 밟히는데
결별하는 너와 나
주섬주섬 눈물을 수거하고 있는 사이
침통한 노래는 불리어지고
예정된 이별 여행마저 취소해 버렸다
예기치 않은 홀로서기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갈 수 있을까
슬픔 대신 불어 터진 국수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우겨넣고 있겠지
습관적으로 돌이켰던 블랙 커피처럼
쓰디쓴 추억을
빛바랜 사진 들여다보듯
다시 설탕 찍어 오물대진 않겠다
미안하다
죽도록 그리워도
나는 결코
네 마음 근처를 서성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역사, 백은선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 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인을 다시 읽었다. 그 시가 제일 좋다. 나는 그렇다.
옥수수는 은박지에 싸여 있었다. 김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옥수수였고 옥수수를 먹는 일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썩 잘 어울리니까. 그런데 거꾸로, 돌고래 울음을 녹음하고 틀고 녹음하기를 반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모른다. 모르지만 너무 슬플 것 같다.
오늘은 너랑 소파에 앉아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지다가 뒤집혀버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쩔 때는 림보에 갇혀 있는 기분도 든다. 그치만 행복한 무엇이 무형의 뿔처럼 조금씩 자란다. 나는 현상과 감정에 무연해 지고 있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나도 생각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이후와 이후에 씌어진 시와 그 시의 이후에서부터 다시 씌어진 이후와...... 이것을 무수히 반복한 다음.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 조각을 주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구현우
흰 시계탑 아래에서 만났지 정오의 어두움 광장과 민낯 무분별한 화합 그런 것들 건강한 아픔이 있다 행인이 말하는 걸 일행도 아닌 내가 들었다 열두 시가 지나서야 겨우 너를 찾았다 언제나 제때 오는 것은 없다 종소리가 멎었으나 아무렴 어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로 했다 둘이 있어도 둘이 아니어도 다만 하나의 슬픔이었다
회복에 전념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계탑 왼편에서 나아질 때를 기다렸다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겠지만 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보이지 않는 것을 부를 수는 있으니 병일 수밖에 80년대에 태어난 내가 70년대에 만들어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오롯이 볼 수 있는 때가 있었다는 거다 웃고 있는 네가 외로워 보인다고 하면 너는 더 크게 웃어버리는구나 인간이 언어를 익히면 비로소 모든 색을 쓸 수 있지만 신은 언어를 아는 자에게 검은 잉크밖에 주지 않는다 사람의 사랑은 불완전하므로, 하나의 마음이 둘의 몸을 쓴다 낮으로 흐르든 밤으로 쏟아지든 시계는 늘 열두 시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한마디 말의 간격으로 늙어가는 중이었다 사실은 나의 동물이 나를 키웠다 2000년의 여름 오후 세 시와 1900년의 겨울 오후 다섯 시가 겹쳐진다 비극은 결국 한 가지인가 너의 감정은 샘플이 없는 또 다른 검정이었다 무거운 마음이 입밖으로 나오자 가벼운 말이 되었다 네가 여기로 오기 전부터 만남은 실현되었다 눈이 내렸고 우리의 손에서, 손 안에서 많은 결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도시에서 고장날 일이 없는 건 시계탑만이 유일했다 이번 생에서 너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다음날에는
그 다음
다음날에는, 한번 더, 첫사랑이기를, 그렇게 되뇌면서

느린 달팽이의 사랑,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 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여름과 해와 가장 긴 그림자와 파괴에 대하여, 백은선
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했지만, 나는 죽음을 잘 모른다.
나는 초록 우산 나는 점박이 강아지 나는 발 잘린 비둘기 나는 두 손 가득 작은 돌을 주워 주먹을 꼭 쥔 아이 나는 빛 속에서 지워지는 사지 나는 차창에 매달린 물방울 나는 물방울 속 굴절되는 빨강 나는 발등 여름 내내 신은 슬리퍼 자국 나는 속력 나는 하늘 나는 심해의 눈먼 희귀 생물 나는 말 없는 그림 그림 속 보랏빛 자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임사 체험에 관한 다큐를 보았다. 거기서 어떤 여자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죽은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죽은 아버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단호하게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건 어쩐지 B급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누군가 악질적인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운동장 벤치에 앉아 두 아이가 농구 골대에 축구공을 던져 넣는 걸 보았다. 빗맞은 공이 힘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한 아이가 느리게 공 쪽으로 걷는다. 발끝으로 모래를 걷어차며.
죽음은, 죽음이라는 말은 너무 거대하다. 어쩐지 몇만 배나 확대한 개미를 들여다보는 기분. 작은 곤충이라고 썼다가 개미로 고쳤다. 구체성 밖으로 가고 싶다. 자두 대신 과일이라고 쓰고 싶다. 어쩌면 모과라고 쓸 수도 있었지. 응.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지렁이를 꾹꾹 찌른다. 지렁이가 몸을 비튼다. 액을 흘리며 구불거리다 딱딱해진다. 그걸 보며 죽음을 떠올리지 못했다. 비 내린 다음 날 쨍쨍한 햇빛 아래 납작하게 마른 지렁이 같은 것을 생각했던가. 아니야. 아니야. 너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다큐 마지막에는 감독과 평론가의 대담 영상이 있다. 감독의 기획 의도는 죽음은 가까이 있으며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사람들이 느끼게 해 주고자 했다는 것. 아니요,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걸요. 당신의 의도까지도 모두 장난 같다. 이것을 다큐라고 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했다. 잠깐 생각하다가 물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출발했어. 그래. 한 시간 후에 서점 앞에서 만나.
줄자. 물뿌리개. 근면 성실. 적립카드. 선글라스를 쓴 마네킹. 현금인출기. 방수 시계. 하얀 돌 검은 돌. 세검정. 산후조리. 립밤. 머핀. 졸업 앨범. 선풍기. 소금. 줄리 델피. 해고 통보. 최선. 무의식. 탁구채. 화투. 오리털 이불. 무자비. 부탄가스. 송로버섯. 조립식 주택. 학대와 체벌. 교집합. 추가 요금. 유리 멘탈. 성불. 스테인리스 스팀. 요 라 탱고.
이 세계의 모든 줄무늬.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사랑을 배운다.
나는 오늘 너를 만나고 싶지 않다. 도망치고 싶다.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얼굴이 되어 다른 곳을 걷고 싶다. 그러나 너는 거기 있다. 나는 무었에 이끌린 것처럼 당도하겠지. 반쯤 허물어진 얼굴로 너는 왔어, 하고 웃겠지. 그것을 보는 게 겁나. 너를 믿는 게 겁나.
눈먼 희귀 생물은 빛이 없는 곳에 산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앞을 볼 필요가 없다. 애초에 어둠 뿐이니까. 그런데 나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 네가 없는 언덕에서 너를 생각하며 나는 1초씩 2초씩 네가 되어본다. 아픈 마음이 들어. 흔들리는 풀, 누워있는 풀, 파랗게 풀 냄새 속에서. 이 모든 빛 속에서.
우리는 헤맨다.
진짜를 찾아 헤맨다.
너는 종로 3가 반디앤루니스 앞 계단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너는 <너무 시끄러운 죽음>을 읽고 있었다.
나는 잠깐 네 뒷모습을 보며 서서, 절뚝이며 퍼덕이며 흐려질 때. 너의 어깨가 동그란 머리통이 소름처럼 뼈가 드러난 허리가 구부러진 목이. 절뚝이며 퍼덕이며 흐려질 때. 네가 될 수 없을때.
나는 숨을 쉰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두근대며.
초조하게 침을 삼키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록 죽음에서 멀어지는 기분. 오늘을 알고 모르고 오늘 밖에서 오늘을 찾는 오늘 같은 기분. 그런 기분. 차가운 아주아주 차가운 것을 입 속에 가득 머금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새를 봐. 새를 봐. 날아가는 꼴을 봐. 인사라는 말이 싫다. 싫다는 말도 싫다. 아무 표정 없이 생각을 하는 네가 미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네 앞에서, 나는. 조금 주저하며 손끝을 내려다보며 사실 나는 죽음을 잘 모른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너는 실망한 듯 고개를 흔들겠지. 응. 어쩌면 그럴 줄 알았다고 상관없다고 할지도 몰라. 나는 멋쩍은 듯 밝게 웃으며 뭐 먹으러 갈까? 묻겠지. 응
나라고 쓴 다음 지워버린다.
빛이라고 쓴 다음 지워버린다.
풀 냄새, 풀 냄새. 지독한 냄새 속에서.
너는 몇 번이나 되살아난다.
싫다.

겨울 사랑,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위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 년 백설이 되고 싶다.

여름의 구심력, 박연준
나뭇잎은 걸을 수 없다
묶일 발이 없고
손과 목과 얼굴이 없다
이파리에 돋은 맥은
여름이 숨긴 지도다
푸른 것들은 떨어질 일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어쩌면 좋을까
버드나무 아래 머리카락을
떨어뜨리고 가는 사람
투명하게 길어지는 꼬리
떠난 공들이 돌아오고
태어난 자리에서 맹세가 사그라질 때
어떤 여름은
영원 속을 지나간다

애프터 글로우, 최백규
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세상 모든 곳이 다 오락이어서
캐릭터들이 죽는데 플레이어가 동전을 계속 넣었다
어느 주말 오후 흰 캔버스를 세우고 멍하니 그리워했다 있는 것들만 죽여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을 웃으며 안았다 손 끝으로 상대방의 생명선을 끝까지 따라가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이 한다는 비극을 믿었다 우리가 금방 죽을 거라 했다
어젯밤 꿈에 눈이 부어서 오늘도 젖은 하루를 살았다 창밖엔 숲 이외의 것들만 조용히 번져서
우리의 기후가 같을까 무서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무 일 없이 골목을 걸었다
와락 쏟아지다 터뜨려지는 파스텔이다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찬 음식을 오래 씹어야만 하는 나이
무심히 낯선 여름이 굴러가고
두려웠다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빛과 실, 한강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인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마한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조으이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여덟 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편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실- 빛을 내는 실.
*
그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이듬해에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 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다?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가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치맨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번째 장편 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즈이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끼,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유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 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타고?
*
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 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잊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 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아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이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